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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게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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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즈키 게이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투수로 활약했다. 1965년 긴테쓰에 입단하여 1985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317승을 기록했으며, 20세기 마지막 300승 투수이다. 1969년, 1977년, 1978년 다승왕을 차지했으며, 1978년에는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하는 등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긴테쓰의 감독을 맡았으나, 선수와의 갈등으로 인해 중도 사임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2002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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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게이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스즈키 게이시
로마자 표기Keishi Suzuki
출생일1947년 9월 28일
출생지효고현 니시와키시
사망일알려지지 않음
신장181cm
체중86kg
투구좌투
타석좌타
포지션투수
등번호1
선수 경력
프로 입단 연도1965년
드래프트 순위드래프트 2위
첫 출장1966년 5월 4일
마지막 경기1985년 7월 9일
소속 구단긴테쓰 버펄로스 (1966년 - 1985년)
주요 성적일본 프로 야구 트리플 크라운 (1978년)
8x 20승 달성
2번의 노히트 노런 달성
수상 경력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2002년)
감독 경력
소속 구단긴테쓰 버펄로스 (1993년 - 1995년)
통계
승-패 기록317승 238패
평균 자책점3.11
탈삼진3,061

2. 선수 경력

스즈키 게이시는 이쿠에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세에 긴테쓰 버펄로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1967년 222개의 탈삼진으로 퍼시픽 리그 1위를 차지했고, 1968년에는 305개의 탈삼진으로 다시 한번 리그 1위를 기록하며 뛰어난 투구 능력을 보여주었다. (같은 해 359이닝으로 NPB 이닝 선두를 기록) 1969년은 스즈키에게 최고의 해로, NPB에서 승리, 탈삼진, 이닝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1970년에도 247개의 탈삼진으로 리그 1위를 기록했다. 1978년에는 2.02의 평균자책점으로 퍼시픽 리그 평균자책점 챔피언에 올랐으며, 통산 8시즌 동안 NPB에서 탈삼진 1위를 차지했다.[2] 또한 통산 71개의 완봉승으로 일본 프로 야구 역대 5위에 랭크되었다.[2]

투수치고는 꽤 괜찮은 타자였으며, 퍼시픽 리그가 1975년지명 타자 제도를 시행하기 전 9시즌 동안 통산 타율 .209, 13개의 홈런을 기록했다.[1]

1985년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긴테쓰에서 활약하며, 1979년1980년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1979년1980년의 플레이오프와 일본 시리즈 2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고, 1979년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는 완봉승, 1980년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는 완투승을 거두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84년에는 통산 300승[48]과 3000탈삼진을 달성했다.

선수 생활을 마친 후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킨테츠 버팔로스의 감독을 맡아 노모 히데오를 지도했다(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3]

2002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4] 200승 이상을 기록하며 메이큐카이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그의 등번호 1번은 버팔로스가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합병되기 전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2. 1. 프로 입단 전

원래는 오른손잡이였으나, 네 살 때에 오른팔이 골절됐을 때 프로 야구 선수로 키우고 싶다는 아버지의 의향으로 왼손잡이로 교정됐다. 이쿠에이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64년 2학년 때 하계 고시엔 효고 현 예선에서 결승에 진출했지만 시바이케 히로아키 투수를 앞세운 다키가와 고등학교에게 0대 1로 패했다. 그러나 같은 해 가을 긴키 대회에서는 결승에 진출, 쿄요 고등학교의 노자키 츠네오와 투수전을 벌여 연장 17회 접전 끝에 사요나라 승리를 거두었다. 이듬해 1965년 봄의 선발 출전을 결정지었다. 2차전(첫 경기)에서 도쿠시마 상업고등학교의 도시미쓰 다카아키 투수(닛폰 생명)에게 막혀서 1대 3으로 졌다.[7] 같은 해 하계 효고 현 예선 결승에서는 호토쿠가쿠엔 고등학교와 맞대결을 펼쳐 에이스 투수인 타니무라 토모히로와 투수전을 펼친 끝에, 0대 1로 끝내기 패배를 당해 하계 고시엔 대회 출전은 무산됐다. 고등학교 동기로는 포수 시오야 마모루(센다이), 3루수 후지무라 테츠야가 있다.

2. 2. 프로 야구 선수 시절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이쿠에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2순위로 긴테쓰 버펄로스에 입단했다. 계약금은 800만이었다.[8] 입단 초기부터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긴테쓰의 에이스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입단 1년째인 1966년 5월부터 선발 투수로 기용되어 10승 12패를 기록했으며, 규정 투구 이닝 (18위, 평균 자책점 3.19)도 달성했다. 이듬해 1967년에는 21승 13패를 기록했고, 그해부터 5년 연속 20승을 올리며 에이스가 되었다.

1968년 8월 8일 도에이와의 경기(닛세이 구장)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52] 1969년에는 24승으로 최다승을 기록했다. 1971년 9월 9일 니시테쓰와의 경기(닛세이 구장)에서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52] 젊은 시절에는 에가와 유타카와 함께 "세의 에가와, 파의 스즈키"로 불리며 탈삼진이 많은 투수였다. 1967년부터 1972년까지 6년 연속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지만, 1972년 무렵부터 탈삼진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투구 내용의 질도 저하되기 시작했다. 스즈키는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입단 초에는 제구력이 안 좋았어요. 1년차 개막 직후에는 볼넷 연발로 2군으로 떨어지기도 했죠. 제구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닛세이 구장 덕분이에요. 홈런을 경계해서 낮은 쪽을 공략하는 투구를, 구장이 가르쳐줬어요. 두 번의 노히트 노런은 닛세이가 준 보상이었죠.[10]

1974년 감독으로 취임한 니시모토 유키오의 지도에 따라, 힘에 의존하는 직구 위주의 투구를 고치고 제구력과 배구를 중시하는 두뇌 플레이를 구축해 나갔다. 처음에는 니시모토에게 반발하여, 1974년 오프에 주포 도이 마사히로가 트레이드되었을 때, "다음은 내 차례"라고 생각하고, 한신 감독 요시다 요시오에게 트레이드를 신청하는 전화를 걸기도 했다.[11] 1975년 3월 한신과의 오픈전에서 4이닝 4실점으로 부진하자 니시모토로부터 "조금은 저쪽 투수(야마모토 가즈유키 - 4년차)를 본받아!"라며 벤치에서 질책을 받았지만, 이내 니시모토가 자신과 팀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지도를 받아들였다.[11] 또한, 투수 코치 스기우라 타다시로부터 "힘으로 던지려면 씨름 선수를 데려와라"라며 릴리스 시 이외에는 힘을 빼는 투구술을 지도받았다.[12]

1975년에는 4년 만에 20승 이상을 올렸고, 평균 자책점도 2.26(무라타 쵸지에 이어 리그 2위)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탈삼진 수는 감소했지만, 불필요한 볼넷과 실점도 감소했다. 이때부터 아리타 슈조와 배터리를 이루게 되었다.

1977년에는 200승을 달성했고, 20승으로 최다승을 기록했다. 1978년에는 25승으로 2년 연속 최다승, 평균 자책점 2.02로 최우수 평균 자책점을 획득했다. 같은 해 당시 일본 신기록인 10경기 연속 완투 승리를 기록하며, 멋진 투구로 옛날의 강속구가 되살아났고, 최다 탈삼진, 최다 완봉도 기록하여 "5관왕" 중 승률을 제외한 4개 부문에서 리그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그 해 스즈키를 마지막으로 일본 프로야구에서 연간 25승 이상을 올린 투수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13]

1979년1980년 긴테쓰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1979년과 1980년의 플레이오프와 일본 시리즈에서는, 모두 2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다. 특히 일본 시리즈에서는 1979년 2차전에서 완봉승, 1980년 2차전에서도 완투승을 거두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83년, 스즈키 코지로가 야쿠르트에서 긴테쓰로 이적해오면서, 스즈키 성을 가진 투수가 2명이 되었다. 구단은 스코어보드 등에 '스즈키 게이'로 표기했다.

1984년 5월 5일 닛폰햄전에서 통산 300승을 달성[48]했고, 같은 해 통산 3000탈삼진도 달성했다.

1985년 7월 10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등번호 1번은 긴테쓰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23] (2004년 오릭스와의 합병으로 소멸)

3. 지도자 경력 (긴테쓰 버펄로스 감독)

긴테쓰 버펄로스 감독을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역임했다. 취임 초 스프링 캠프에서 선수들에게 스파이크를 신고 런닝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컨디셔닝 코치 다치바나 류지는 부상 위험을 이유로 반대했다. 스즈키는 자신의 경험을 내세워 양보하지 않았고, 결국 다치바나는 시즌 종료 후 팀을 떠났다. 이 일로 노모 히데오요시이 마사토 등 투수진과의 대립이 심화되었다.[65]

결국 노모와 요시이를 2군으로 강등시켰고, 1995년 초 노모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요시이는 야쿠르트로 이적했다. 스즈키는 "노모가 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것은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비판했지만, 노모의 이적에는 구단과 프런트에 대한 불신감도 작용했다.[65]

1995년, 주력 선수들의 부진과 부상이 겹치면서 팀은 침체되었고, 스즈키는 시즌 도중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노모가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면서 스즈키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다. 에나쓰 유타카는 스즈키와 노모 모두 친분이 있어 복잡한 심경을 저서에 밝히기도 했다.[65]

가네무라 요시아키는 저서 《이기는 감독, 지는 보스》에서 스즈키를 '최악의 감독'이라고 비판했고, 지바 롯데 마린스 단장 히로오카 다쓰로도 "긴테쓰는 좋은 선수가 많은데 감독과 선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혹평했다.[65] 스즈키는 훗날 "선수들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위축시킨 적도 있어 반성할 것이 많다"고 회고했다.[62]

연도구단순위경기승리패전무승부승률게임차팀 홈런팀 타율팀 방어율나이
1993년긴테쓰4위13066595.5287.0145.2583.6246세
1994년2위13068593.5357.5169.2744.2447세
1995년6위8833532.384----48세
통산: 3년34816717110.494A클래스 1회, B클래스 2회


  • 1995년, 성적 부진으로 8월 8일 사임. 감독 대행은 미즈타니 사네오.

3. 1. 감독 사임 이후

스즈키 게이시는 현역에서 은퇴한 후, NHK 야구 해설자와 스포츠 닛폰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4] 2002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4] 메이큐카이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2008년, 노모 히데오의 은퇴에 대해 "머리가 숙여진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4. 플레이 스타일

스즈키 게이시는 직구를 주 무기로 하는 강력한 투구와 뛰어난 탈삼진 능력이 특징이었다. '초혼(草魂)'이라는 별명처럼 끈질긴 투구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52] 아리타 슈조와의 콤비 플레이가 돋보였으며, 특히 견제구 기술이 뛰어나 도루왕이었던 후쿠모토 유타카간베 도시오와 함께 스즈키를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투수로 꼽았다. 후쿠모토는 8mm 필름을 통해 투수를 연구했는데, 이는 스즈키와 간베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통산 560피홈런은 세계 기록이며, 스즈키는 이를 적극적인 승부의 결과로 해석하며 "남자의 훈장"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통산 78차례의 무볼넷 완투 기록에 대해서는 "컨트롤은 물론이고 누구에게서도 도망치지 않았던 증거"라고 말했다.[68] 레론 리는 스즈키를 "자신이 맞붙은 최고의 좌완 투수"라며 메이저 리그에서도 그 정도의 투수는 없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입단 초기에는 제구력이 좋지 않았으나, 닛폰 생명 구장의 특성을 활용하여 낮은 코스로 공을 던지는 법을 익혔다.[52] 이후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지도를 통해 제구와 볼배합을 중시하는 두뇌적인 피칭을 구축해 나갔다.[53] 처음에는 니시모토에게 반발하기도 했지만, 그의 진심을 깨닫고 지도를 받아들여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

노무라 가쓰야는 스즈키를 전형적인 '기술자' 타입의 투수로 평가했다. 노무라는 투수를 자신이 던지는 공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타자와 승부하는 '기술자' 타입과 타자의 심리를 읽어 볼배합을 하는 '심리학자' 타입으로 나누었다. 스즈키는 가네다 마사이치와 같은 '기술자' 타입으로, 자신의 투구 기술을 연마하는 엄격한 연습을 높이 평가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점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팀 플레이 경시나 다른 투수 교육의 어려움을 가져왔다는 지적도 있었다.

통산 317승 가운데 288승이 선발 승리이며,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대 1위 기록이다. 선발 완투를 선호했던 스즈키는 구원승을 좋아하지 않아 29승에 그쳤고, 통산 세이브는 2개뿐이었다.

5.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연도타이틀성적
1969년다승왕24승
1977년다승왕20승
1978년다승왕, 최우수 평균 자책점25승, 평균 자책점 2.02
1967년 ~ 1972년, 1974년, 1978년최다 탈삼진[2]8회 (1967년 222K, 1968년 305K, 1969년 286K, 1970년 247K, 1971년 269K, 1972년 180K, 1974년 141K, 1978년 178K)
1975년최고 승률.786
1969년, 1975년, 1978년베스트 나인3회
1984년 6월월간 MVP1회
1980년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우수 선수상1회
2002년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통산 71개의 완봉승으로, 일본 프로 야구 역대 5위에 랭크되어 있다.[2]

6. 개인 기록

기록내용
첫 등판1966년 5월 4일, 대 도쿄 오리온스 5차전(도쿄 스타디움), 3회말에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2와 1/3이닝 3실점
첫 탈삼진1966년 5월 17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5차전(주니치 스타디움), 3회초에 미야하라 히데아키로부터
첫 승리1966년 5월 24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8차전(고라쿠엔 구장), 5회말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5이닝 무실점
첫 선발·첫 선발 승리·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1966년 6월 3일, 대 난카이 호크스 7차전(닛폰 생명 구장)
첫 세이브1974년 8월 25일, 대 롯데 오리온스 전기 7차전(미야기 구장), 8회말 2사에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1과 1/3이닝 무실점
통산 1000탈삼진1970년 4월 29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3차전(닛폰 생명 구장), 4회초에 요네다 데쓰야로부터 ※역대 36번째
통산 100승1971년 4월 10일, 대 롯데 오리온스 1차전(도쿄 스타디움), 9이닝 3실점(2자책점)으로 완투 승리 ※역대 51번째
통산 100선발승1971년 9월 9일, 대 니시테쓰 라이온스 26차전(닛폰 생명 구장), 9이닝 4사사구 노히트 노런
통산 1500탈삼진1972년 4월 22일, 대 난카이 호크스 2차전(닛폰 생명 구장), 3회초에 니시오카 산시로로부터 ※역대 19번째
통산 150승1974년 6월 25일, 대 롯데 오리온스 전기 12차전(고라쿠엔 구장), 9이닝 2실점으로 완투 승리 ※역대 25번째
통산 150선발승1975년 9월 3일, 대 롯데 오리온스 후기 9차전(센다이 미야기 구장), 9이닝 1실점으로 완투 승리
통산 2000탈삼진1975년 8월 17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후기 3차전(닛폰 생명 구장), 5회초에 스미토모 다이라로부터 ※역대 9번째
통산 200승1977년 4월 26일, 대 롯데 오리온스 전기 3차전(닛폰 생명 구장), 5회초에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5이닝 무실점 ※역대 15번째
통산 200선발승1978년 7월 6일, 대 난카이 호크스 후기 3차전(오사카 구장), 9이닝 완봉 승리 ※역대 6번째
통산 500경기 등판1978년 4월 1일, 대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 전기 1차전(헤이와다이 야구장), 9이닝 4실점(3자책점)으로 완투 승리 ※역대 36번째
통산 2500탈삼진1979년 4월 19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전기 1차전(닛폰 생명 구장), 8회초에 가시와바라 준이치로부터 ※역대 6번째
통산 250승1979년 9월 20일, 대 난카이 호크스 후기 11차전(닛폰 생명 구장), 9이닝 1실점으로 완투 승리 ※역대 8번째
통산 250선발승1982년 9월 10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후기 10차전(나고야 구장), 9이닝 2실점으로 완투 승리
통산 600경기 등판1981년 7월 12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후기 4차전(닛폰 생명 구장), 선발 등판하여 5이닝 4실점에서 패전 투수 ※역대 19번째
통산 300승1984년 5월 5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7차전(후지이데라 구장), 9이닝 3실점으로 완투 승리 ※역대 6번째
통산 3000탈삼진1984년 9월 1일, 대 난카이 호크스 22차전(오사카 구장), 2회말에 가도타 히로미쓰로부터 ※역대 4번째
통산 700경기 등판1985년 6월 4일, 대 난카이 호크스 9차전(닛폰 생명 구장), 선발 등판하여 6이닝 4실점 ※역대 10번째
노히트 노런[52]* 1968년 8월 8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19차전(닛폰 생명 구장) ※역대 48번째
10경기 연속 완투 승리1978년에 달성(당시 일본 기록이며, 현재도 퍼시픽 리그 기록)
통산 78 무사사구 경기1983년 10월 5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전에서 74경기 무사사구 경기 달성. 최종적으로 78경기까지 기록을 늘림(일본 프로 야구 기록).
통산 340차례 완투※퍼시픽 리그 기록
시즌 30차례 완투1978년 ※퍼시픽 리그 기록
통산 71차례 완봉 승리※퍼시픽 리그 기록
시즌 20승 이상8회(1967년 ~ 1971년, 1975년, 1977년, 1978년) ※퍼시픽 리그 타이 기록
개막전 선발 투수14회(가네다 마사이치와 대등한 프로 야구 기록)
올스타전 출장15회(1966년 ~ 1973년, 1975년 ~ 1978년, 1980년, 1983년 ~ 1984년)


참조

[1] 웹사이트 Keishi Suzuki, https://www.baseball[...] 2015-04-05
[2] 서적 The Shutout in Major League Baseball: A History McFarland 2013
[3] 웹사이트 Foreign Intrigue: Nomo Baffles Hitters As He Awaits First Win, https://web.archive.[...] 1995-05-26
[4] 웹사이트 Suzuki, Keishi http://english.baseb[...] 2014-09-11
[5] 뉴스 鈴木啓示さんの野球愛&地元愛 名球会イベント欠席し故郷の学童野球大会に 草魂節で子どもたち激励 https://www.daily.co[...] 株式会社デイリースポーツ 2022-12-11
[6] 뉴스 鈴木啓示氏 新人に伝えたいことは「ノー」と言う勇気 https://www.sponichi[...] スポニチアネックス 2016-01-13
[7] 서적 選抜高等学校野球大会60年史 1989
[8] Youtube 【とんでもない契約】鈴木啓示の入団秘話!高校生の目の前で800万円の札束が置かれた!?なぜ万年最下位の近鉄に!? https://www.youtube.[...]
[9] 서적 投げたらアカン!わが友・わが人生訓 恒文社 1985
[10] 서적 感涙!ナニワ野球伝説 朝日新聞出版 2011
[11] 간행물 西本との出会いが300勝への転機 鈴木啓示 イースト・プレス 2004
[12] 서적 伝説の剛速球投手 君は山口高志を見たか 講談社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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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기타 LPレコード「悲願30年 近鉄バファローズ ドキュメント 栄光のV1」의 水本義政 해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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